구기정은 실재하는 자연 풍경을 디지털 기술로 가공하고 이를 물리적 공간에서 감각 가능하도록 배치하는 작업을 시도하며 인간과 기계, 자연 사이에서 발생 가능한 관계들에 주목한다. 그는 자연풍경 이미지를 3D 렌더링 기반의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하고 이미지에 다른 차원의 가상의 정보를 부여한다. 디지털 이미지로 재현된 실재의 풍경은 실재와 가상의 경계에 위치하여 모호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층위의 자연을 작업의 대상으로 삼으며 실제 자연과 디지털 이미지의 자연을 뒤섞어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동시대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참조한다. 〈Coagulation〉는 실제 이끼, 숲, 잔디 등을 매크로 렌즈, 고해상도 카메라로 촬영한 후 3D 렌더링 기술로 합성, 왜곡하여 생성한 디지털 이미지, 살아있는 잔디, 반원의 조형물로 구성된 혼합형 설치작업이다. 관람자는 바닥에 펼쳐진 살아있는 잔디를 직접 밟고 그 위에 놓인 반원의 조형물을 몸으로 체험하며 스크린 속 증강된 이미지를 감상할 수 있다. 이때 작품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요소들의 흔적이 상호작용하는 사이 공간으로 존재한다. 이는 평면과 입체의 사이, 스틸과 무빙의 사이, 실제와 환영의 사이에서 관계성과 차이를 내포하는 경계를 함축한다. 작품의 사이 공간은 경계에 대한 인식과 함께 혼종성과 이질성을 생산하기 위한 저항의 몸짓을 반영한다. 스크린에 둥둥 떠다니는 증강된 이미지와 거친 잔디와 차가운 조형물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요소들이 공존하며 또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는 영역에 대한 시각을 은유적으로 내포한다. 영상에 등장하는 디지털 이미지의 자연은 실제 자연보다 더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증강된 모습이다. 작가는 영상을 보는 이로 하여금 실존하는 이미지인지 혹은 디지털로 생산된 이미지인지 교란을 일으켜 딜레마 상태에 빠트린다. 화면 속에서 멈춤 없이 유동하는 이미지는 기존의 인식에 혼란을 줌으로써 관람자의 몰입을 유도하며 동시에 이질성을 인식할 수 있는 잠재적 균열의 순간들을 창출한다. 관람자는 이미지의 본질과 대상 인식 사이에 발생하는 엇박자 안에서 자신의 시각 체계를 돌아보며 의심하고 확신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자연과 기술로 만들어진 미디어 환경의 관계를 스스로 재해석 및 재고하게 된다.
/ * 작가는 ‘변위 지도’라는 기술을 통해 사진 이미지의 정보를 활용하여 이미지의 사실적인 질감을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변위 지도(displacement mapping)는 사진 이미지 정보를 활용하여 평면 이미지의 밝은 부분은 튀어나오게 하고, 어두운 부분은 들어가도록 계산해서 입체적인 높낮이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
박고은
<트리오 A>, 2024, 지상파 레이저 스캔자료, 2채널 영상, 약 10분
식물의 몸짓을 경유하는 우리의 시선
박고은은 움직임과 공간의 관계를 기록하는 인포메이션 디자인, 데이터 시각화, 패턴을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며 서울과 암스테르담에서 작가 겸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주로 도구/공간에 내포된 특정한 움직임을 발굴하고 도구가 가진 퍼포먼스적인 특징을 시각화한다. 도구의 동적인 패턴을 만드는 그의 작업은 우리가 쉽게 지나쳤던 도구들의 일상적인 ‘움직임(gesture)’을 인식하고 재해석하여, 물체와 인간 사이에 시적인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작가는 움직임을 기록하기 위하여 연속된 움직임을 구성하는 각각의 제스처와 움직임이 진행되는 시간과 공간을 추적하며 순간적인 동작을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트리오 A〉는 지상파 레이저 스캐너(TLS)로 기록된 나무의 미세한 움직임 데이터를 그래픽으로 재구조화한 영상 작업이다. 작품은 과학자들이 자연 식물의 움직임을 관찰, 기록할 때 사용하는 데이터들의 색깔, 형태, 구조를 대상으로 삼는다. 나무의 움직임을 과학적인 수치, 데이터로 기록한 스캔 파일은 인공적인 정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수만 개의 포인트 클라우드가 숲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있다. 작가는 식물의 연속된 움직임을 구성하는 각각의 제스처를 분석하고 시스템화하여 움직임에 대한 형태를 만들고 그것들을 조합하여 그래픽으로 구현한다. 작품은 자연의 ‘몸짓(Gesture)’의 의미와 멀리서 바라보았을 때 보이지 않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들, 미세한 움직임, 자연의 생명력에 주목한다. 작가는 데이터 파일 속 정보를 해독하고 구조를 재편하여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주한다. 변주된 데이터는 그래픽으로 파편화되어 형광빛의 강렬한 색면 사이사이로 비집고 나와 해방된다. 파편화된 데이터들은 그래픽적으로 패턴을 이루며 서로 흡수하고 뒤섞이면서 이미지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작품 속 그래픽 요소는 흩어지고 모이며 서로 접하는 다른 요소들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고 호흡하는 막으로 존재하게 된다. 영상은 빛에 일렁이며 내부에서 빛의 간섭이 일어나기도, 빛의 일부가 투과하여 화면 깊숙이 스며들어 반사가 되기도 한다. 작품을 구성하는 각각의 파편들은 틈새와 함께 얽히는 구조 속에서 실제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물질적인 층위를 은유한다.
/ * 지상파 레이저 스캔 데이터 출처: Eetu Puttonen, National Land Survey of Finland
지상파 레이저 스캐너는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움직이는 나무, 물, 대지와 같은 자연을 시각적으로 기록하는데 쓰이는 3D 스캐너의 한 종류이다. */
/ * 영상 텍스트 출처: The dignity of living beings with regard to plants, (Federal Ethics Committee on Non-Human Biotechnology ECNH)
영상은 2016년 8월 24일, 핀란드에 있는 단풍나무가 해가 뜨고, 지는 시간 동안 스스로 움직임이는 모습을 스캔한 43개의 데이터 파일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데이터 파일은 약 16,000개의 작은 포인트 클라우드로 이루어져 있다. 해당 영상의 모든 그래픽은 Cloud Compare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만들어졌다. */
신승재
<소리심기>, 2024, 알루미늄 프레임, 8ch 스피커, 화분, pcb, 220x400x300cm
감각의 투사와 미분화된 잠재성
신승재는 자연의 키워드를 가진 다양한 매체들을 활용하여 음소재를 만들고, 컴퓨터를 통하여 알고리즘을 개발하고 작곡한다. 그는 작곡이라는 형태와 컴퓨터 음악이라는 방식을 통해 입체음향이라는 기술을 조명한다. 〈소리심기〉는 살아있는 식물과 미세전류 센서, 아두이노, 스피커로 구성된 인터랙티브 오디오비주얼 설치작업이다. 관람자가 식물 잎과 접촉했을 때 식물 세포가 감지하여 측정되는 데이터는 작가가 설계한 입체음향 시스템에서 작곡의 구성 요소로 활용된다. 관람자의 손과 식물의 잎이 맞닿으면 식물의 세포는 이를 감지하고 칼슘 이온의 농도가 높아진다. 식물의 잎에 부착된 미세전류 센서로 측정된 데이터는 작가가 설계한 입체음향 시스템으로 전달된다. 작품은 관객의 물리적인 접촉과 소통에 따라 생성된 식물의 사운드가 입체음향 시스템에서 전개됨에 따라 구체화된다. 식물 잎은 경계를 허물기 위해 침투되어야 하는 식물의 피부로서 상처받기 쉬운 살갗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관람자의 손길에 의해 식물의 잎은 고정성과 유동성, 반복과 변이 등 양면적인 요소가 공존하면서 바깥으로의 접촉 지점으로서 ‘막’이 존재하게 된다. 식물의 막은 외부와 상호적 관계를 담는 피부와 같이 안과 밖을 연결하는 경계면으로 작용한다. 때로는 식물의 실체를 덮고 있는 껍질로서, 때로는 지각하는 주체로서 식물의 막은 식물 내부와 외부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이면서 동시에 외부 세계와의 통로가 되어 식물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경, 공기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관람자는 식물 잎과 접촉을 하고 관계를 맺으며 ‘사이’의 개념을 획득하고 시각에서 촉각이라는 감각의 확장을 경험한다. 작가는 식물과 관객과의 물리적 접촉으로 생겨난 입체적 사운드를 ‘씨앗’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표방한다. 작품 관람을 마친 관객은 ‘씨앗’을 다시 작품의 화단에 심는 행위로 전개되는데, 이는 생태계 식물의 종이 다양하게 변하고, 퍼지듯 ‘심기’가 되풀이되어 관람객의 지각이 확장됨을 시사한다. 식물과 관람자의 관계 맺음이 계속됨에 따라 데이터는 축적되어 연속적으로 새로운 구조의 사운드가 창발한다. 이는 식물 잎이 외부 접촉을 통해 자극을 받고 시간의 누적에 따라 복합적인 피부 자아가 형성됨을 은유한다. 작품 속 사운드는 식물과 관객의 관계 속에서 조절되며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새로운 선율로 거듭 변주된다.
소수빈은 환경에 의해 변형된 식물 변이에 관해 연구하며, 이동성이 없는 식물에게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이주의 자유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작가는 ‘미래의 공-존 시스템’에 대해 논의하며 기계+생명의 형태가 미래 환경에 어떤 논의를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주로 자연의 순환 구조 안에서 식물체가 가지는 증식, 분열, 반복의 과정을 식물의 형태와 패턴을 통해 연구한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식물은 생명이라는 공통의 개념을 공유하며 각각 변형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생물의 유기적인 구조가 자연 이미지로 재현되거나 가상의 형태로 구현되어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작품을 제작하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Vivisystem〉은 관람자는 직접 식물의 이동을 개입하여 현 생태계의 모습을 구현하는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이다. 살아있는 식물과 인공식물을 손으로 터치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연출하며 놀이라는 감각적 체험을 즐길 수 있다. 마그넷 판 위에서 실제 식물과 인공식물이 이동하는 과정 안에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궁극적으로 식물은 실체적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기술,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준안정적으로 변형되는 존재임을 시사한다. 관람자에 의해 재배치되고 재조합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은 이미지 연출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내재되어 있는 의미가 교체됨으로써 이전의 의미는 지워지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된다. 검은 평면 위에 인공식물과 실제 식물을 뒤섞여 있는 모습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과 자연 그대로 태어난 것들이 섞여 다양한 이주 경로를 통해 움직이며 공존하는 현 생태계를 상기한다. 식물은 본래의 종에서 다른 식물과 이종교배를 하며 색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거나 인간이 개입하여 유전자 변형을 통해 갖가지 종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다양한 경유로 영향을 받고 변화한다. 갖가지 종으로 변신을 하며 진화를 감행하는 식물은 본래 하이브리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작품명인 ‘비비시스템(vivisystem)’은 ‘태어난 것들과 만들어진 것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하나의 혼종된 생물계의 현상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살아있는 식물과 인공식물을 직접 평면 위에서 이주시키며 적극적으로 식물의 이주(이동)에 개입하게 된다. 이는 유전자 변형을 통해 식물의 본래의 모습(종)이 사라지거나 이종으로 거듭나는 등 생태계의 질서가 무분별해지는 현실과 기술의 시대에서 식물의 존재성, 생태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재고한다.
서상희
<Between_(가상)정원>, 2024, 식물, 4채널 영상, 가변설치, 3분 30초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불투명한 중첩
서상희는 현실과 가상, 디지털과 아날로그와 같이 서로 구별되는 것 간의 경계들이 만들어내는 다른 공간, 그리고 서로 다른 것이 만나 충돌하여 생성되는 에너지와 사건, 무한한 중첩된 가치들에 주목한다. 작가는 현실 공간에 가상의 자연환경을 구현하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와해하여 감각의 확장과 몰입을 통해 실제와 상상의 경계에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안한다. 그의 작업은 현실의 물리적 공간에 가상이 스며드는 과정을 통해 자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Between_(가상)정원〉는 아날로그를 상징하는 자연의 오브제인 식물을 다양한 높이와 간격으로 배치하고, 디지털의 대표적 요소인 컴퓨터를 활용한 인공적 빛과 회화적 표현이 가미된 영상 이미지를 결합한 영상 설치작업이다. 작품은 실제 살아있는 식물과 작가가 상상한 식물들이 한 공간에 머무르면서 가상의 정원을 구축한다. 각각 다른 위치에 매달려있는 식물은 관람자가 바라보는 위치, 시점에 따라 모습이 변화하고, 식물 요소 간의 간격과 위치는 새로운 관계와 비율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형성되는 풍경은 레이어를 중첩해나가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사이 영역을 유동적으로 증식해나간다. 이때 사이를 매개하는 영역은 혼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경계이며, 존재하지만 어느 공간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지점이다. 감각적 체험은 가능하나 물리적 존재성은 지니지 않은 가상 정원과 살아있는 식물로 이뤄진 정원의 경계에서 관람자는 몰입, 경험, 연결을 경험하며 실재와 가상이 연결되는 어떤 지점에 진입하게 된다. 가상과 현실이 만나는 경계 지점에서 작품 속 가상 식물은 실제 식물과 만나 불투명해지고 식물에 투사되는 이미지는 실제 식물에 변형을 가하여 또 다른 자연의 모습을 형성한다. 이때 관람자는 실제 식물에 중첩된 3차원 그래픽 식물들 사이의 틈 공간을 돌아다니며 실제와 가상이 함께 만들어내는 불투명한 망에서 하나의 레이어로 자리한다. 그리고 실제 식물과 가상 풍경과 공간 안에서 교차하며 작품 속에서 하나의 대상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 작용한다. 작가는 우연적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요소들이 만나 충돌하여 생성되는 어떤 퍼텐셜 에너지에 시선을 두며, 이때 발생하는 틈 사이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미적 경험을 모색한다. 작품은 디지털 미디어의 차가운 속성에 자연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주입된 가상 정원 안에서 새로운 관계성을 발견하는 사유를 확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