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로 공명(共鳴)하기

《불균형에서 오는 퍼텐셜 에너지(The Cacophony of Unbalance)》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언뜻 조화로워 보였지만 이내 넘실대는 에너지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는 인간-기술-환경의 관계에 대해 다면적인 층위로 발화한다. 참여 작가 구기정, 박고은, 서상희, 소수빈, 신승재의 작품이 서로 충돌하며 생성되는 에너지를 그대로 분출하고 있는 전시는 예술과 기술의 융합이라는 결괏값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결괏값을 도출시킨 과정 그 자체를 퍼텐셜 에너지로 추적하고 이를 전시라는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동시에 서로 다른 주체인 인간-기술-환경 사이를 교량하며 이들이 공존케 하는 관계성에 주목한다. 기획자는 인간과 기술적 대상의 관계 맺음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왔다. 지난 기획 전시인 《지나친 몸짓들: 메아리를 깨워 울려 퍼지게 하느냐(Boundless Gesture: Resonate With You》에서는 ‘몸짓’의 수행자로서 인간과 기술적 대상인 인공지능의 ‘창의적인 번역’의 가능성과 한계를 살펴보았다. 《불균형에서 오는 퍼텐셜 에너지(The Cacophony of Unbalance)》에서는 잠재하는 물리적인 에너지인 퍼텐셜 에너지를 다섯 점의 작업을 통해 시각화한다. 동시에 출품작 안과 밖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과포화된 긴장 상태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은 그의 ‘개체화(individuation)’ 이론에서 존재에 대해 완전하거나 안정적이지 않고, 단일한 것도 동일한 것도 아닌 그 이상의 준 안정적인 시스템인 퍼텐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처럼 전시에서 일종의 준안정상태인 퍼텐셜 에너지는 작품 자체에 내재한 것뿐만 아니라 작품 간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각기 다른 앙상블을 보여준다.
     전시에서 처음 마주하는 구기정의 응고라는 의미를 내포한 〈Coagulation〉 (2022)은 이끼, 숲, 잔디를 촬영한 후 3D 렌더링 기술을 통해 생성한 디지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영상은 실제 자연보다 더 세밀하게 증강된 이미지로 관람객에게 시각적인 인지 교란을 일으킨다. 그 뒤로 두 벽면을 가득 채우는 박고은의 〈트리오 A〉(2024)는 지상파 레이저 스캐너(TLS)로 기록된 핀란드 단풍나무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여주는 영상이다. 수만 개의 포인트 클라우드로 이루어진 데이터는 시각화된 색깔, 형태, 구조로 인해 숲처럼 움직이며 마치 자연의 ‘몸짓’처럼 보인다. 전시장의 오른편에 자리한 신승재의 〈소리 심기〉(2024)는 식물에 미세전류 센서를 이식하여 관람객의 물리적인 접촉이 사운드로 변환된다. 작가는 이 사운드를 ‘씨앗’으로 선보이는데, 씨앗은 관람객이 식물을 만질 때 발생하는 미세전류의 소리이자 이 소리를 경험하는 공간 그 자체가 된다. 그 뒤의 벽면에는 소수빈의 〈Vivisystem〉(2021)을 확인할 수 있다. 비비시스템은 자연발생적이거나 인위적임을 구분하지 않고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가진 것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관람객은 살아있는 식물과 인공적인 조화를 직접 이동시키며 작품 속 생태계에 능동적인 개입을 한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월에서 마주할 수 있는 서상희의 〈Between_(가상)정원〉(2024)은 아날로그로 대변되는 식물과 디지털로 표상되는 맵핑의 대비로 예술적 체험을 선사한다.
     전시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이전의 기술만능주의나 반기술주의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기술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그동안 기술에 대한 이해는 인류 발전을 위한 도구적인 시선이 일반적이었으며 예술에서도 기술은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지금의 기술과 예술의 융합에 대해서 기존의 논의들은 한계가 분명하다. 현대미술에서 기술의 사용은 이미 기존의 캔버스와 물감을 대신하는 새로운 매체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매체의 변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에서 기술은 전시의 형식과 관람 방법 또한 쌍방향으로 변화시킨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미술에서 기술은 그 자체로 작업의 직접적인 매개자가 되며 기술적 대상과 미학적 대상의 분리가 불가능해진다. 이를 전제로 전시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미학적 사유를 제안하고 있다. 기술과 예술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접근 방식이 아니라 평등한 위치의 주체로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몽동이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개체를 발생시킨 생성 작용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전시는 인간과 기술 그리고 예술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역동적인 관계 맺음에 주목한다.
     참여작가 구기정, 박고은, 서상희, 소수빈, 신승재는 3D 렌더링 기술, 지상파 레이저 스캐너(TLS), 데이터, 증강현실, 맵핑 등 작업의 기술적인 면을 제외하고도 ‘식물’이라는 시각적 키워드로 만나게 된다. 구기정의 이끼, 숲, 잔디, 박고은의 핀란드 단풍나무, 서상희와 소수빈, 신승재의 식물들이 그렇다. 식물은 표면상으로는 기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자연물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기술과 식물은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 참여 작가의 작업 매체가 ‘식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시의 서문에서 밝혔듯, 전시는 기술이 ‘독’이면서 ‘약’으로 기능하는 현시대에 기술과 인간의 상호 공존을 위한 새로운 관계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식물의 가치 역시 기술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태도와 관점에 따라 약초, 화초, 독초, 잡초로 달라진다. 잡초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식물 외의 여러 풀을 통칭하는데 그 이름에서도 인간의 편의가 함축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잡초는 정원이나 논밭에서는 성가신 존재로 여겨지지만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토끼풀은 뿌리로 흙을 움켜쥐어 토양 침식을 방지한다. 역시 흔하게 볼 수 있는 민들레는 동의보감에서도 염증 치료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약재이다. 갈대나 억새, 모시풀은 최근 화석연료의 대체 에너지인 바이오에너지의 원료 작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밖에도 잡초는 곤충이나 새들에게 서식지와 먹이를 제공하며 생물종 다양성을 높이는 생태계의 구성원이기도 하다. 잡초는 상호 연결된 생태계라는 그물망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잡초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쓸모없는 풀이 아닌 새로운 식물적 주체라는 인식론적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 수만 년 동안 인류와 공생을 유지하며 공진화해온 잡초의 일대기는 인간과 기술의 새로운 관계 정립에 유의미한 참고 사례가 되지 않을까.
     《불균형에서 오는 퍼텐셜 에너지(The Cacophony of Unbalance)》는 기술과 공존하는 인간의 세계에 대해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제시하고 정서적인 공명이 동행하기를 유도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본질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기술에 대한 일방적인 열망이나 두려움과 같은 극단적인 사고는 인간 및 환경과의 관계성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기술적 대상 존재 방식의 고유성을 이해할 때 인간과 기술의 관계가 공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지층에서 기술과 함께하는 예술이 어떠한 관계 맺음으로 그 미감을 드러내고 있는지 참여작가 구기정, 박고은, 신승재, 소수빈, 서상희의 작업으로 확인해보자. 새로운 관점으로 기술적 대상을 바라보며 기술적 주체 간의 앙상블을 선보이는 《불균형에서 오는 퍼텐셜 에너지(The Cacophony of unbalance)》를 통해 정서적인 공명(共鳴)의 순간을 맞이하기를 바란다.
 

홍라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